인간과 사람을 구별하는 성원권의 개념과 그것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한 투쟁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사회 현상들을 성원권의 투쟁 관점에서 바라보는 책. 망각하지 않고서도 사회를 이룩하려면 우리는 증여의 논리가 아니라 환대를 통해서 사회를 만들어야 하며 이 때의 환대는 절대적이어야 함을 서술한다.
빌드업을 착실하게 해서 커다란 집을 완공하는 느낌의 책. 너무 재미있고 좋은 책이었다. 쉽지는 않지만.. 줄을 엄청 많이 치며 읽었을 만큼 공감 가는 문장, 머리를 탁 치는 부분들이 많았다. 특히 4장의 모욕과 굴욕, 5장의 우정 부분. ⠀
내용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관점에서도,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미묘하고 길게 풀어 설명해야만 했던, 납득시키기거나 이해시키기 위해 긴 노력을 필요로 했던 것을 몇 문장과 단어들의 조합으로 명료하고 담백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해 줬다. 그게 가능하게끔 지식을 가용하게 체화한다는 건 너무 멋진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 자체만으로 자기만의 공간, 즉 장소가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이 되기 위해선, 환대가 필수적이다. 환대는 나의 공간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공간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
당신이 타는 차가, 당신이 입는 옷이, 당신이 사는 아파트가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줄 것이다. 미디어는 날마다 천국을 보여 주면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가르친다. 완벽한 비주얼, 유창한 영어 발음, 그리고 예능감은 청빈, 겸손, 근면이라는 고전적 덕목들을 대신하여 구원을 약속하는 최신의 덕목들이다. 소비주의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캘빈주의는 예전의 캘빈주의가 그랬듯이, 항상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할 뿐 누구의 죄도 결정적으로 사해주지 않는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은 끊임없는 굴욕과 강등의 위협에 시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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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과 모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모욕에는 언제나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모든 사람이 예의바르게 행동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굴욕을 느낄 수 있다. 굴욕이라는 단어가 인기를 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연예인의 굴욕 사진을 퍼나르면서 네티즌들은 자기들이 누군가를 모욕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연예인이 자기 관리를 못 해서 굴욕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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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욕은 모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론적으로 모욕은 구조가 아니라 상호작용 질서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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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나를 모욕하지 않았다면, 내가 느끼는 굴욕감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문제가 된다.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들은 이것을 자존감의 결여 탓으로 돌린다. 그들의 주장은 이런 식이다. 실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굴욕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에게 자존감이 부족한 것이다. 당신은 혹시 어린 시절에 사랑을 충분히 못 받은 게 아닐까? 그렇다면 먼저 당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받은 아이를 달래주어야 한다. 자신의 가치를 믿어라! 그리고 당당해져라! 당신이 긍정적일수록 재취업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한 사람이 자존감을 유지하려면, 그에게 실제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자존감은 아큐의 정신승리법과 비슷해져버린다. 신자유주의의 모순은 상호작용 질서의 차원에서 (즉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면서, 구조의 차원에서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단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 ⠀
비유컨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림자를 갖는 것과 같다. 몸에 붙어다니면서 몸의 자리를 표시해주는 무엇, 몸과 닮아 있고 몸을 흉내내지만, 몸의 고유한 표정을 모두 지워버리면서 그렇게 하는 무엇, 몸이 태어날 때 함께 나타나고, 몸이 죽을 때 함께 사라지는 무엇 말이다. 사람으로 인지된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몸이 아니라 그림자로 인지된다는 것이다. 공적 공간에서 교환되는 상호작용의 의례는 개별적인 몸을 향하는 것 같지만, 기실 그림자에 바쳐지는 것이다. ⠀